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버레디 계획 (문단 편집) === 2차: 1953년 휴전협상 반대 및 반공포로 석방 === 195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대선 공약과 취임 후 정책은 일관적으로 한국전쟁의 조기종결과 미군의 조속한 귀환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주구장창 북진통일만을 부르짖으며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반대하던 말던 1953년 3월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었고 [[소련]]에서 그 후계를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장 권력투쟁을 벌이던 [[베리야]], [[흐루쇼프]], [[말렌코프]]는 한국의 전쟁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중국]]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수뇌부들도 한국전쟁에 피곤을 느껴 [[냉전]]의 양대 축인 미국과 소련의 수뇌부 모두 슬슬 한국전쟁을 끝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었다. 이승만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북한은 예측불가능한 존재였기 때문에 자신의 반공 성향에 더해 무언가 북한을 막아줄 확실한 안전장치 없이 휴전이 맺어지면 신생 대한민국의 미래도 폭풍 앞의 촛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전쟁 이전부터 미국이 없어도 대한민국 혼자서라도 쳐들어가 북한을 끝장내겠다며 하도 떠들어댔고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을 때까지도 좁아터진 산악지형인 한반도의 형세에서 기동전을 정식 교리로 채택한 미군에게 있어서 지옥 그 자체였다는 것에 더해 미국이 "저 인간한테 군사원조를 해줬다간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라며 미군을 주둔시켜 주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던 걸 생각하면 이승만에게 있어서 멸북 북진통일이 아닌 휴전으로서의 북한과의 불편한 동거는 자살행위 그 자체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승만과 한국 정부의 휴전 반대 의사가 명백해지자 미국은 원치 않게 전쟁이 지속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만약 한국 정부가 휴전을 거부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지속한다면? 물론 현실적으로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군]]이야 그렇다치고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까지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국이 전쟁을 지속한다면 공산진영에서는 ''''너님들 휴전한다 해놓고 왜 전쟁 계속함?'''' 하면서 전쟁을 계속할 게 뻔한 상황에서 한국을 버려두고 UN군이 철군한다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았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여차하면 군사력으로 한국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궁리를 했는데 발췌개헌 시기였던 바로 작년에 수립했던 계획이 남아 있었다. 미국은 이때 계획을 약간 수정보완하여 꺼내들기만 하면 되었다. 1953년 5월 4일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는 휘하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추상적인 수준으로 최소 UN군정 실시, 최대 이승만 축출 및 친미적인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비상계획을 수립했다. 이때 비로소 구체적인 작전명인 '에버레디(Everready)'가 등장하여 6월 8일 UN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에버레디 플랜을 승인했다. 다만 이 승인은 바로 작전을 실행하라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며칠 뒤인 6월 18일 이승만은 UN군과 상의 없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독단적으로 반공포로들을 일제히 석방했다]]. 후일 아이젠하워는 회고록에서 임기 8년 동안 유일하게 자다가 깬 사건이라고 언급했고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아침 면도 중에 보고를 받고 화들짝 놀라 얼굴을 베었다. 처칠은 매우 분노하여 이승만이건 뭐건 다 박살내고 한국에 신정부를 세우자고 아이젠하워에 요청했을 정도였다. 에버레디 플랜의 발동은 시간 문제였다. 미국 대통령이 처칠 같은 인물이었다면 바로 실행되었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허구한 날 [[조지 S. 패튼|패튼]]과 [[버나드 로 몽고메리|몽고메리]]가 삿대질하고 고성지르며 멱살잡던 가운데서 꾹 참아낸 세기의 보살이자~~ 신사로 유명했던 아이젠하워였고 아이젠하워는 일단 참은 뒤 국무부 차관보 월터 S.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한국에 급파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도 자기가 계속 미국과 척을 지면 어떻게 될지 아주 잘 알았다. 이미 저지른 반공 포로 석방은 어쩔 수 없다 치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하기로 로버트슨과 합의했다. 그렇게 휴전이 되었음에도 이승만은 공공연히 휴전을 인정하지 않자 테일러는 자체적으로 10월 28일 에버레디 플랜의 수정안을 준비하고 신임 UN군 사령관 존 헐의 승인을 받았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해가 바뀐 1954년 11월 8일 도쿄에서 헐, 테일러 등 군부 인사와 주한미국대사 엘릭스 브릭스 등이 모여 이승만이 계속 휴전을 거부할 경우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는 데 동의하고 본국에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말로만 휴전 불인정을 외치고 실제로는 한국군에 휴전을 무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고 딱히 군을 움직이지 않는 등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백악관]], 워싱턴의 관료들은 에버레디 플랜을 발동시키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